• 최종편집 2021-05-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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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고4.19혁명의 원인과 경과와 영향과 역사적 평가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1. 4.19혁명의 원인과 경과    2021년 4월 19일은 4.19혁명 제61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역사적인 날이다.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부터 4월 26일까지 1주일 간 대한한국 전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3.15부정선거에 항거해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붕괴시킨 자유민주주의 시민혁명이다.   1960.3.15일 투표일에 마산고등학교 학생들이 선거무효를 외치며 시위하는 모습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이 인권을 탄압하고 3.15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 하자 대구(2.28), 대전(3.8), 마산(3.15), 광주, 충주, 서울 등 대도시의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곤봉과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학생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 학생들이 목숨을 잃고 중상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3·15 마산의거에 참여한 김주열 마산상고 학생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올라 국민들이 분노하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결국 4.19혁명이 터지고 말았다.   서울 수송초등학교 학생들의 경무대 앞까지 나와 시위하는 모습      4.19혁명은 전국의 초·중·고·대학생, 일반 시민, 교수 등 10여 만 명이 참여해 대대적으로 격렬한 시위를 벌여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6월 15일 제2공화국을 탄생시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나 많은 희생을 치루고 말았다. 실제로 시위 진압에 동원된 무장 경찰들과 깡패들이 최루탄을 쏘거나 곤봉을 휘두르거나 총을 발사하여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이 사망했고, 1500여 명이 부상을 당해 유가족들의 마음을 지금도 아프게 하고 있다. 특히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동료 학우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시위를 벌인 후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에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어 도로 여기저기에 쓰러지자 애국 시민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시위가 난무하는 바람에 사회질서가 혼란하고,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이 파손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2. 4.19혁명의 영향과 역사적 평가    청년학생들이 주도한 4.19혁명은 한국의 역사에서 학생과 일반 대중이 봉기하여 독재정권을 쓰러뜨린 아시아 최초의 사건으로 헌법 제1조 제2항에서 규정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증해 주어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똑바로 심어주었다. 그리고 4.19혁명은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에 맞선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킨 2017년 촛불 시민혁명 등 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탄탄한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었다면, 4.19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었다고 언급한다. 한편 어느 정치학자는 4.19혁명을 절대왕정의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에 비유하였고, 어느 경제학자는 4.19혁명을 국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한 민주적 혁명으로 평가하였다.   4월 26일 하야하고 청와대를 떠나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른 이승만가 허정 수반      4.19혁명이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로 성공을 거두자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하는 바람에 야당인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반공보수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고 4.19혁명을 4.19사태로 저평가했다. 무엇보다 장면 내각 때 경찰 내 발포 책임자에게 무죄 선고를 하자 학생들과 시민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민주당은 장면 총리가 주도하는 신파와 윤보선 대통령이 주도하는 구파의 대립으로 여전히 정치사회적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 틈을 타서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5.16 혁명이라 치켜세우고 4.19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해 4.19의거라고 폄하했다고 한다.    그래도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는 자유, 민주, 정의 등 4.19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3. 4.19혁명의 추모사업    국가보훈처에서는 4.19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4.19로 8길 17에 국립 4.19 민주묘지 · 기념탑 · 기념관을 조성하고, 인근의 경전철 역명을 4.19민주묘지역으로 정했다.    4·19묘지에는 445분의 4․19혁명 민주영령들이 안장되어 있고, 1995년 4·19혁명 35주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4·19묘지는 민주성지로 불리고 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4.19로 8길 17에 위치한 국립 4.19 민주묘지    4.19 운동이 크게 벌어진 곳 중 한 곳인 광주광역시에는 4.19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2012년 4월 14일 금남 56번 버스를 419번 버스로 바꾸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에서는 2013년부터 해마다 4.19 혁명 국민문화제라는 이름으로 각종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거져 얻어지지 않고 국민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장렬한 투쟁과 희생으로 얻어진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그 안에 수많은 국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열정이 녹아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앞으로 4.19혁명 정신인 자유, 민주, 정의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확고하게 수립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에서 4.19혁명 관련 민주시민교육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4.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4.19혁명 제61주년 기념행사 개최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4월 19일 오전 국가보훈처 주최로 서울 강북구 소재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열린 제60주년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해 "4·19혁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 최초의 민주화운동이고, 전 세계 학생운동의 시작이기도 하다며, 정부는 그 의미를 특별히 기리고 4·19혁명의 정신을 인류에게 남기기 위해 2022년을 목표로 4·19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추진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4·19혁명 민주영령들의 희생과 정신을 세계인과 함께 계승하고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한 하반기로 연기된 ‘4·19혁명 국민문화제'가 60주년의 의미에 걸맞은 국민 모두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1960년 민중의 비폭력 저항으로 한국 민주주의 싹을 틔운 시민혁명인 '제61주년 4·19혁명 기념식'을 4월 19일 오전 10시 국립4·19민주묘지에서 개최했다. 4·19혁명 기념식은 '새 아침, 민주주의를 노래하다'라는 주제로 정부 주요인사, 4·19혁명 유공자 및 유족 등 99명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분향, 국민의례, 경과보고, 기념사, 청년의 다짐, 기념공연, '4·19의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40분간 진행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4.19혁명 61주년을 맞이하여 2021년 4월 19일 오전 국립 4·19민 주묘지를 찾아 경건하게 참배하고 있는 모습 문재인 대통령은 4·19혁명 제61주년을 맞아 4월 19일 오전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를 참배하며 민주영령의 희생과 헌신을 추모했다. 그리고 참배 소감으로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4·19민주묘지 참배는 취임 후 이번이 세 번째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듬해인 2018년 첫 참배 이후, 지난해 제60주년 기념식 참석을 계기로 참배한 바 있다. 문대통령은 2021년 4월 19일 오전 국립 4·19민주묘지 참배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4·19 혁명 61주년을 맞아'라는 글에서 1960년 4월 19일은 "목숨보다 뜨거운 열망으로 우리 가슴 깊이 민주주의를 심었던 날"이라며 "4·19 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굳건한 뿌리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19 혁명의 주역들께 김수영 시인의 시 한 구절을 다시 바친다"며 '푸른 하늘을'의 일부를 인용했다. 5. 허태정 대전광역시장의 4.19혁명 제61주년 기념행사 참여축사  허태정 대전광역시장이 4월 19일 오전 중동 목척교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을 찾아 헌화하고 있는 모습 허태정 대전광역시장은 4.19혁명 61주년을 맞아 오전 동구 중동 목척교에서 (사)대전세종충남4.19혁명회(회장 최영상) 회원들과 함께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을 찾아 헌화하고, "4.19혁명은 독재세력을 민주시민의 힘으로 몰아내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허 시장은 4월 19일 열린 주간업무회의에서 "대전의 3·8 민주의거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한 가운데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역사성과 상징성이 크다"며 "4·19 혁명이 3·8 민주의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기념사업에 잘 담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고문헌> 1. 김운태,『한국정치론』, 박영사, 2002.2.15. 2. 이극찬,『정치학』, 법문사, 2010.2.20. 3. 윤석연,『4.19 혁명』, 한겨레틴틴, 2010.12.15. 4. 박세영,『처음 배우는 4.19 혁명과 민주주의』, 북멘토, 2020.4.6. 5. 이찬우, “국가보훈처 제61주년 4·19혁명 기념식 개최”, 세이프타임즈, 2021.4.16일자. 6. 이원구, “허태정 대전시장,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 헌화”, 백제뉴스, 2021.4.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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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0
  • 특별기고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송시열 탄생 413주년을 맞아
    2020년 12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탄생한지 413주년이 되는 경사로운 날이다. 국보 제239호 송시열 초상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은 1607년(선조 40년) 11월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외가에서 은진 송씨 송갑조(宋甲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봉사(奉事) 구수(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갑조(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자방(自防)의 딸이다. 우암 송시열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세 살에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7세에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이를 받아썼다 한다. 아버지는 항상 주자는 공자의 후계자요 율곡은 주자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면서 송시열에게 주자를 열심히 배우라 권했다. 이후 8세가 된 송시열은 이종인 송이창(宋爾昌)의 문하에서 그의 아들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학문을 닦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후일 평생 뜻을 같이한 계기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12세 때에는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우암 송시열은 1625년(인조 3) 19세 때에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결혼했고, 22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 충남 연산에 은거하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러나 수학한 지 일 년 만에 스승이 주욱자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서 사사했다. 그와 같이 동문수학한 이들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시남(市南) 유계(兪棨) 등이었다. 이들이 이른바 충남 5현(忠南五賢)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이었다. 1633년(인조 11년)에 27세의 송시열은 대제학(大提學) 최명길(崔鳴吉)이 주관한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고 2년 뒤 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됐다. 후일 효종(孝宗)과의 두터운 의리는 이때 시작된 것이었다.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대군(大君)과 비빈(妃嬪)들은 강화로 피난하고 송시열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고 대군들이 볼모로 잡혀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속리산으로 내려와 피난해 있던 어머니를 모셨다. 난이 끝난 뒤에는 영동 황간으로 들어가 독서와 학문에 정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이 그에게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했다. 효종이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당시 총애를 받던 무관 이완(李浣)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세도를 부리던 김자점(金自點)이 귀양을 가자 그의 아들 김식(金鉽)이 부제학(副提學) 신면(申冕)과 공모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청은 군사를 동원해 국경을 압박하고 특사를 보내 협박과 공갈을 했다. 이로써 북벌은 잠시 중단되고 송시열도 책임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어 그의 시신은 경기도 수원 무봉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숙종 23년인 1697년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매봉산으로 이장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 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우암 송시열의 시문집『송자대전』겉표지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주자대전(朱子大全)』과『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송자대전(宋子大全)』등의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다. 이후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체계가 되었다. 우암 송시열은 일생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공자의『춘추』속에 담긴 대의를 구현하였으며, 전쟁과 반란 등이 계속되어 무너진 인륜적 질서를 회복하는 데 절의의 숭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해 전력을 쏟은 인물이다. 실제로 우암 송시열은 그의 생거지 적거지를 따라 그 행적과 자취를 돌아다보면 가정과 향당과 조정에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실천한 참 선비였음을 곧 알 수가 있다. 큰 눈으로 보면 그가 추구한 세상은 의리가 존중되고 예의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문명(文明)의 세상이었다. 그것은 당시의 주류 조선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이상 세계였으며, 또한 앞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 역시 종국적으로는 인간의 가치와 도리가 중시되고 예의가 존중되는 ‘문명의 세상’이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던 암서재 전경   우암 송시열 선생은 인생 만년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은거하고 암서재(巖棲齋)에서 학문을 연마하면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장암(丈巖) 정호(鄭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명재(明齋) 윤증(尹拯)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직(直, 곧 정직)으로 무장하여 올곧은 선비의 길을 걸었고, 학자로서 송자(宋子)에 이르렀으며, 학덕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한 시대의 산림(山林)의 종장이었으며, 북벌(北伐)과 예치(禮治)를 국가대의로 내걸고 시대를 이끌어 ‘대로(大老 : 나라의 큰 어른)’로 추앙되었던 큰 인물이다. 그리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 선생과 함께 '충청오현'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으로 송자(宋子)란 존칭을 사용했다. 우암 송시열은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대전광역시 동구 우암사적공원에 마련된 유물관에는 우암 송시열의 영정과 인장, 효종이 우암에게 북벌을 당부하며 하사했다는 담비털옷, 글씨와 장서 등 그 당시 역사적 배경을 살필 수 있는 것들이 전시되어 선생의 흔적을 쫓아 사적공원을 찾은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은 우암 송시열 선생 탄신 40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1월 청명관에서 우암 송시열 선생 기획 특별전시를 열어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 탄생 413주년를 기리는 숭모제 기념사진 그리고 동구청과 동구문화원이 해마다 10월 말에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위치하고 있는 우암사적공원에서 우암 송시열의 높은 학덕과 대의를 기리는 우암문화제(학술대회, 우암 휘호대회, 전국백일장)를 개최하고 있고,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해마다 그가 태어난 날인 음력 11월 13일 전후에 우암 송시열의 고향인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마을에서 지역 유림과 은진 송씨 후손 등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숭모제를 열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 1. 대전광역시 충남대 유학연구소,『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 도서출판 이화, 2008.3.31. 2. 곽신환,『우암 송시열』, 서광사, 2012.9.30. 3. 한기범,『우암 송시열의 생거지와 적거지』, 누마루, 2014.5.10. 4. “송시열(宋時烈)”,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7.31. 5. 김갑동, “우암사적 공원과 송시열”, 금강일보, 2015.6.21일자. 3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5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112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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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30
  • 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신상구  세계천부경협회(회장:무상 이병희)가 우주 통합기운 창조와 환(桓)민족 혼(魂)의 부활을 목적으로 2013년 12월 13일(음력 11월 11일) 천부경 81자의 처음 구절인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에서 11을 마지막 구절인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에서 11을 취해 음력 11월11일을 세계천부경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20년 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어수선한 사회 환경을 고려하여 음력 11월11일(양력 12월 25일) 오전 11시에 대전광역시 유성구 용계동에 위치하고 있는 세계천부경협회 본부에서 임직원만 모여서 '한밭천천제'라는 주제로 조촐히 기념행사를 갖기로 했으나, 강화된 코로나19 정부 정책에 따라 12월 23일 전면 취소하기로 했다.   천부경은 글자 그대로 하늘의 이치에 부합하는 으뜸 경전으로 총 81자로 구성돼 있다.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天一一地一二人一三一積十鉅無匱化三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一玅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一終無終一   천부경은 숫자 6을 중심으로 상경 28자, 중경 24자, 하경 29자로 나누어진다.  천부경 81자 중 숫자가 31개, 그 31개 숫자 중 1이 무려 11개나 분포하여 천부경을 우주 수학의 원전, 일태극 경전이라고 한다.   천부경(天符經)은 하늘의 형상과 뜻을 숫자와 문자로 담아낸 조화경으로 우리 한민족 최고의 경전이지만, 아직까지 초중고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아,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도 그 존재 여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불행중 다행으로 국내외서 천부경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2019년 12월 말 현재로 단행본이 130여 종 출간되었고, 학위논문이 77건(석사학위 54건, 박사학위 23건), 일반 학술논문이 199건이나 발표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젊은 사람들도 천부경에 대해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갖고 조사연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천부경은 원래 9000년 전 고대 환국으로부터 구전으로 전해오다가 6000년 전 한국의 고대문자인 녹도문자(鹿圖文字)로 기록돼 전승됐다. 그 후 4400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는 전서(篆書)로 전해졌는데, 신라의 대학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이 돌로 만든 비석에 전서로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하고 묘향산 석벽에 한문으로 번역하여 옮겨 놓았다. 그런데 단학회 제2대 회장을 역임하고『환단고기(桓檀古記)』를 지은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1920) 선생이 1916년 9월 9일 묘향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석벽에서 천부경을 우연히 발견하고 탁본해서 1917년에 단군 교당으로 원문을 보내 세상에 알려졌다.   한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 81자는 상수학적으로 천(天) · 지(地) · 인(人) 삼원조화의 홍익철학(弘益哲學)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우주 만물의 생성·진화·완성의 원리를 잘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천부경은 우주 삼라만상이 1에서 나와 10까지 펼쳐졌다가 다시 1로 돌아간다는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 하늘(天) · 땅(地), 인간(人) 삼원이 모두 음양으로 작용해서 천지만물이 전개된다는 3수 원리와 음양 원리, 인간의 본심은 원래 태양처럼 밝고 환하여 천지(天地)와 하나가 된다는 태일사상(太一思想)을 담고 있다. 그런데 유사 이래 지구상 어느 나라 어느 학자도 81자의 경문으로 우주 만물의 생성·진화·완성의 원리와 인류 문화의 원형을 밝히지 못해 천부경은 동서양 학자들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천부경은 시의 특징인 단순성, 비유성, 상징성, 애매모호성을 모두 갖추고 있어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므로 독자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천부경을 소재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여 창조경제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가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한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성암 전병훈 선생    천부경은 1975년에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한 대종교의 기본 경전으로 채택되었고, 성암(成庵) 전병훈(全秉薰, 1857-1927) 선생이 1920년 북경에서『정신철학통편』을 발간해 세계 29개국 약 150개 대학도서관에 보급하는 바람에 천부경이 국제화와 세계화가 되었다. 천부경의 無 정신에 괸심이 많았던 독일 실존철학의 대가 하이데커     독일 실존철학의 대가인 하이데커(Martin Heidegger, 1889- 1976)가 1950년대에 프랑스를 방문한 고 열암(洌巖) 박종홍(朴鍾鴻, 1903-1976)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1957년 7월 26일 프라이부르크 인근의 자기 집으로 초청해 천부경의 의미와 해설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런데 박종홍 교수는 부끄럽지만 당시 서양철학 전공학자로 한국철학을 공부하지 않아 천부경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답을 하지 못해 한국 철학을 서양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은 국학원과 증산도가 천부경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자주 개최하여 외국의 학자들도 천부경의 실체와 의미를 많이 알고 있다.   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을 계기로 하여 천부경이 초·중·고의 교과서와 대학의 동양철학 교재에 게재되어 모든 국민들이 천부경의 실체를 잘 알고, 천부경의 삼원조화의 홍익철학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여 인류 공영과 세계 평화에 나름대로 기여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음력 11월 11일 세계천부경의 날 기념행사가 앞으로 발전을 거듭해 국가 행사로 개최되고, 머지않아 천부경이 UNESCO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기를 열망한다.   <참고문헌> 1. 윤창대,『정신철학통편(전병훈선생의 생애와 정신을 중심으로)』, 우리출판사, 2004. 6.20. 2. 안경전,「인류 역사의 원형문화 원전, 천부경」, 사단법인 대한사랑,『대한사랑』2019년 가을호, 상생출판, 2019.10.2. 3. 호연지기, 천부경을 전세계에 알린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 알아두면 상식, 2020.8. 20. 4. 辛相龜, “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을 맞아”, 중부매일, 2020.12.24일자.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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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5
  • 우리가 알고 있다는 질환
    우리가 아는 질환은 대부분 일반 사람들도 평이하게 이해하는 어느정도 일상 생활에 녹아있는 병들이다. 당뇨 고혈압 충수돌기(맹장)염  등등등과연 일반인이 잘 알고 있다는 이런질환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걸까?   당뇨의 진단 코드 즉 당뇨의 종류만도 200가지가 넘는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환자는 왜 분류를 했는지는 설명이 없으면 환자는 그저 당뇨일뿐이다.결국 처방에 따른 병만 있을 뿐이다.환자나 보호자도 처방을 듣는게 편하다. 200가지 넘는 분류 이유는 있지만 그곳은 전문 내분비 의사에게도 미지의 세계일뿐이다. 숙제는 미래의 세대에게 남겨 놓은것 처럼  엄청난 분류가 남겨져 있다. 현대 우리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반도체도 하루가멀다하고 새로운 제품 업그레이드된 상품이 나온다.핸드폰도 자동차도 등등등우리는 미시 세계 ,또한 거시세계를 같이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듣고 이해 하는척 또 아는척 하고 있다. 과거를 돌이겨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건 없다 .인간의 몸은 없어진것도 새로 생긴것도 없다. 그렇지만 인간의 정신 세계는 더 불안해져있다. 자신의 몸은 그대로 인데 정신세계는 왜  다른 현상을 보일까?새로운걸 찿기 때문인거 같다. 병에 걸리면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새로운 좋은 음식 새로운 좋은 습관 새로운 좋은 환경 등등죽을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살아온 과정중에 잘못된것을 들을려고하고 고칠려고 한다. 그게 이유이건 아니건 관계없이많은 정보는 있지만 앞으로는 그정보의 판단을 스스로 내리는 구조로 세상은 변하고 있다.  즉 모든 정보가 공유 형태로 넘어가고 있다그래서 이제는 인터넷 한줄의 글로 사람들에게 들은 말로 모두가 전문이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짜 전문으로 생각할줄 아는이들은 묻혀간다실제로는 우리가 아는 질환에 대해 알 능력도 안되면서 그들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   유성선병원 박문기 원장  영남대 의과대학을 졸업  대전선병원 교육수련부장, 중증외상센터소장, 유성선병원 진료부원장, 암센터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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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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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고4.19혁명의 원인과 경과와 영향과 역사적 평가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1. 4.19혁명의 원인과 경과    2021년 4월 19일은 4.19혁명 제61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역사적인 날이다.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부터 4월 26일까지 1주일 간 대한한국 전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3.15부정선거에 항거해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붕괴시킨 자유민주주의 시민혁명이다.   1960.3.15일 투표일에 마산고등학교 학생들이 선거무효를 외치며 시위하는 모습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정권이 인권을 탄압하고 3.15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 하자 대구(2.28), 대전(3.8), 마산(3.15), 광주, 충주, 서울 등 대도시의 청년 학생들과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곤봉과 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무자비하게 학생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 학생들이 목숨을 잃고 중상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게다가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던 3·15 마산의거에 참여한 김주열 마산상고 학생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올라 국민들이 분노하자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결국 4.19혁명이 터지고 말았다.   서울 수송초등학교 학생들의 경무대 앞까지 나와 시위하는 모습      4.19혁명은 전국의 초·중·고·대학생, 일반 시민, 교수 등 10여 만 명이 참여해 대대적으로 격렬한 시위를 벌여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6월 15일 제2공화국을 탄생시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나 많은 희생을 치루고 말았다. 실제로 시위 진압에 동원된 무장 경찰들과 깡패들이 최루탄을 쏘거나 곤봉을 휘두르거나 총을 발사하여 4.19혁명 과정에서 186명이 사망했고, 1500여 명이 부상을 당해 유가족들의 마음을 지금도 아프게 하고 있다. 특히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구속된 동료 학우들의 석방과 학원 자유를 요구하며 평화시위를 벌인 후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청계천 4가를 지날 때에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어 도로 여기저기에 쓰러지자 애국 시민들이 분노했다. 그리고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하여 시위가 난무하는 바람에 사회질서가 혼란하고,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이 파손되어 많은 피해를 입었다. 2. 4.19혁명의 영향과 역사적 평가    청년학생들이 주도한 4.19혁명은 한국의 역사에서 학생과 일반 대중이 봉기하여 독재정권을 쓰러뜨린 아시아 최초의 사건으로 헌법 제1조 제2항에서 규정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증해 주어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민주주의 정신을 똑바로 심어주었다. 그리고 4.19혁명은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에 맞선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6월 민주항쟁,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킨 2017년 촛불 시민혁명 등 민주화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탄탄한 초석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들은 8.15 광복이 '첫 번째 해방'이었다면, 4.19혁명은 '두 번째 해방'이었다고 언급한다. 한편 어느 정치학자는 4.19혁명을 절대왕정의 구체제를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에 비유하였고, 어느 경제학자는 4.19혁명을 국가 독점 자본주의를 해체한 민주적 혁명으로 평가하였다.   4월 26일 하야하고 청와대를 떠나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른 이승만가 허정 수반      4.19혁명이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로 성공을 거두자 이승만 대통령이 4월 26일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을 하는 바람에 야당인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반공보수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고 4.19혁명을 4.19사태로 저평가했다. 무엇보다 장면 내각 때 경찰 내 발포 책임자에게 무죄 선고를 하자 학생들과 시민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민주당은 장면 총리가 주도하는 신파와 윤보선 대통령이 주도하는 구파의 대립으로 여전히 정치사회적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 틈을 타서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는 5.16 혁명이라 치켜세우고 4.19혁명을 깎아내리기 위해 4.19의거라고 폄하했다고 한다.    그래도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는 자유, 민주, 정의 등 4.19정신을 이어받는다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3. 4.19혁명의 추모사업    국가보훈처에서는 4.19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4.19로 8길 17에 국립 4.19 민주묘지 · 기념탑 · 기념관을 조성하고, 인근의 경전철 역명을 4.19민주묘지역으로 정했다.    4·19묘지에는 445분의 4․19혁명 민주영령들이 안장되어 있고, 1995년 4·19혁명 35주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4·19묘지는 민주성지로 불리고 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4.19로 8길 17에 위치한 국립 4.19 민주묘지    4.19 운동이 크게 벌어진 곳 중 한 곳인 광주광역시에는 4.19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2012년 4월 14일 금남 56번 버스를 419번 버스로 바꾸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에서는 2013년부터 해마다 4.19 혁명 국민문화제라는 이름으로 각종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거져 얻어지지 않고 국민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장렬한 투쟁과 희생으로 얻어진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그 안에 수많은 국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열정이 녹아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앞으로 4.19혁명 정신인 자유, 민주, 정의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확고하게 수립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에서 4.19혁명 관련 민주시민교육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4.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4.19혁명 제61주년 기념행사 개최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4월 19일 오전 국가보훈처 주최로 서울 강북구 소재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열린 제60주년 4.19혁명 기념식에 참석해 "4·19혁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 최초의 민주화운동이고, 전 세계 학생운동의 시작이기도 하다며, 정부는 그 의미를 특별히 기리고 4·19혁명의 정신을 인류에게 남기기 위해 2022년을 목표로 4·19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도 추진하여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4·19혁명 민주영령들의 희생과 정신을 세계인과 함께 계승하고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한 하반기로 연기된 ‘4·19혁명 국민문화제'가 60주년의 의미에 걸맞은 국민 모두의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1960년 민중의 비폭력 저항으로 한국 민주주의 싹을 틔운 시민혁명인 '제61주년 4·19혁명 기념식'을 4월 19일 오전 10시 국립4·19민주묘지에서 개최했다. 4·19혁명 기념식은 '새 아침, 민주주의를 노래하다'라는 주제로 정부 주요인사, 4·19혁명 유공자 및 유족 등 99명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분향, 국민의례, 경과보고, 기념사, 청년의 다짐, 기념공연, '4·19의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40분간 진행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4.19혁명 61주년을 맞이하여 2021년 4월 19일 오전 국립 4·19민 주묘지를 찾아 경건하게 참배하고 있는 모습 문재인 대통령은 4·19혁명 제61주년을 맞아 4월 19일 오전 강북구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를 참배하며 민주영령의 희생과 헌신을 추모했다. 그리고 참배 소감으로 "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4·19민주묘지 참배는 취임 후 이번이 세 번째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듬해인 2018년 첫 참배 이후, 지난해 제60주년 기념식 참석을 계기로 참배한 바 있다. 문대통령은 2021년 4월 19일 오전 국립 4·19민주묘지 참배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4·19 혁명 61주년을 맞아'라는 글에서 1960년 4월 19일은 "목숨보다 뜨거운 열망으로 우리 가슴 깊이 민주주의를 심었던 날"이라며 "4·19 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굳건한 뿌리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19 혁명의 주역들께 김수영 시인의 시 한 구절을 다시 바친다"며 '푸른 하늘을'의 일부를 인용했다. 5. 허태정 대전광역시장의 4.19혁명 제61주년 기념행사 참여축사  허태정 대전광역시장이 4월 19일 오전 중동 목척교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을 찾아 헌화하고 있는 모습 허태정 대전광역시장은 4.19혁명 61주년을 맞아 오전 동구 중동 목척교에서 (사)대전세종충남4.19혁명회(회장 최영상) 회원들과 함께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을 찾아 헌화하고, "4.19혁명은 독재세력을 민주시민의 힘으로 몰아내어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허 시장은 4월 19일 열린 주간업무회의에서 "대전의 3·8 민주의거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한 가운데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역사성과 상징성이 크다"며 "4·19 혁명이 3·8 민주의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기념사업에 잘 담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고문헌> 1. 김운태,『한국정치론』, 박영사, 2002.2.15. 2. 이극찬,『정치학』, 법문사, 2010.2.20. 3. 윤석연,『4.19 혁명』, 한겨레틴틴, 2010.12.15. 4. 박세영,『처음 배우는 4.19 혁명과 민주주의』, 북멘토, 2020.4.6. 5. 이찬우, “국가보훈처 제61주년 4·19혁명 기념식 개최”, 세이프타임즈, 2021.4.16일자. 6. 이원구, “허태정 대전시장,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 헌화”, 백제뉴스, 2021.4.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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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20
  • 특별기고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송시열 탄생 413주년을 맞아
    2020년 12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탄생한지 413주년이 되는 경사로운 날이다. 국보 제239호 송시열 초상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은 1607년(선조 40년) 11월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외가에서 은진 송씨 송갑조(宋甲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봉사(奉事) 구수(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갑조(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자방(自防)의 딸이다. 우암 송시열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세 살에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7세에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이를 받아썼다 한다. 아버지는 항상 주자는 공자의 후계자요 율곡은 주자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면서 송시열에게 주자를 열심히 배우라 권했다. 이후 8세가 된 송시열은 이종인 송이창(宋爾昌)의 문하에서 그의 아들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학문을 닦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후일 평생 뜻을 같이한 계기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12세 때에는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우암 송시열은 1625년(인조 3) 19세 때에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결혼했고, 22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 충남 연산에 은거하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러나 수학한 지 일 년 만에 스승이 주욱자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서 사사했다. 그와 같이 동문수학한 이들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시남(市南) 유계(兪棨) 등이었다. 이들이 이른바 충남 5현(忠南五賢)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이었다. 1633년(인조 11년)에 27세의 송시열은 대제학(大提學) 최명길(崔鳴吉)이 주관한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고 2년 뒤 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됐다. 후일 효종(孝宗)과의 두터운 의리는 이때 시작된 것이었다.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대군(大君)과 비빈(妃嬪)들은 강화로 피난하고 송시열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고 대군들이 볼모로 잡혀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속리산으로 내려와 피난해 있던 어머니를 모셨다. 난이 끝난 뒤에는 영동 황간으로 들어가 독서와 학문에 정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이 그에게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했다. 효종이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당시 총애를 받던 무관 이완(李浣)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세도를 부리던 김자점(金自點)이 귀양을 가자 그의 아들 김식(金鉽)이 부제학(副提學) 신면(申冕)과 공모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청은 군사를 동원해 국경을 압박하고 특사를 보내 협박과 공갈을 했다. 이로써 북벌은 잠시 중단되고 송시열도 책임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어 그의 시신은 경기도 수원 무봉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숙종 23년인 1697년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매봉산으로 이장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 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우암 송시열의 시문집『송자대전』겉표지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주자대전(朱子大全)』과『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송자대전(宋子大全)』등의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다. 이후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체계가 되었다. 우암 송시열은 일생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공자의『춘추』속에 담긴 대의를 구현하였으며, 전쟁과 반란 등이 계속되어 무너진 인륜적 질서를 회복하는 데 절의의 숭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해 전력을 쏟은 인물이다. 실제로 우암 송시열은 그의 생거지 적거지를 따라 그 행적과 자취를 돌아다보면 가정과 향당과 조정에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실천한 참 선비였음을 곧 알 수가 있다. 큰 눈으로 보면 그가 추구한 세상은 의리가 존중되고 예의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문명(文明)의 세상이었다. 그것은 당시의 주류 조선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이상 세계였으며, 또한 앞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 역시 종국적으로는 인간의 가치와 도리가 중시되고 예의가 존중되는 ‘문명의 세상’이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던 암서재 전경   우암 송시열 선생은 인생 만년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은거하고 암서재(巖棲齋)에서 학문을 연마하면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장암(丈巖) 정호(鄭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명재(明齋) 윤증(尹拯)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직(直, 곧 정직)으로 무장하여 올곧은 선비의 길을 걸었고, 학자로서 송자(宋子)에 이르렀으며, 학덕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한 시대의 산림(山林)의 종장이었으며, 북벌(北伐)과 예치(禮治)를 국가대의로 내걸고 시대를 이끌어 ‘대로(大老 : 나라의 큰 어른)’로 추앙되었던 큰 인물이다. 그리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 선생과 함께 '충청오현'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으로 송자(宋子)란 존칭을 사용했다. 우암 송시열은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대전광역시 동구 우암사적공원에 마련된 유물관에는 우암 송시열의 영정과 인장, 효종이 우암에게 북벌을 당부하며 하사했다는 담비털옷, 글씨와 장서 등 그 당시 역사적 배경을 살필 수 있는 것들이 전시되어 선생의 흔적을 쫓아 사적공원을 찾은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은 우암 송시열 선생 탄신 40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1월 청명관에서 우암 송시열 선생 기획 특별전시를 열어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 탄생 413주년를 기리는 숭모제 기념사진 그리고 동구청과 동구문화원이 해마다 10월 말에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위치하고 있는 우암사적공원에서 우암 송시열의 높은 학덕과 대의를 기리는 우암문화제(학술대회, 우암 휘호대회, 전국백일장)를 개최하고 있고,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해마다 그가 태어난 날인 음력 11월 13일 전후에 우암 송시열의 고향인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마을에서 지역 유림과 은진 송씨 후손 등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숭모제를 열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 1. 대전광역시 충남대 유학연구소,『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 도서출판 이화, 2008.3.31. 2. 곽신환,『우암 송시열』, 서광사, 2012.9.30. 3. 한기범,『우암 송시열의 생거지와 적거지』, 누마루, 2014.5.10. 4. “송시열(宋時烈)”,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7.31. 5. 김갑동, “우암사적 공원과 송시열”, 금강일보, 2015.6.21일자. 3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5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112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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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30
  • 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신상구  세계천부경협회(회장:무상 이병희)가 우주 통합기운 창조와 환(桓)민족 혼(魂)의 부활을 목적으로 2013년 12월 13일(음력 11월 11일) 천부경 81자의 처음 구절인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에서 11을 마지막 구절인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에서 11을 취해 음력 11월11일을 세계천부경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20년 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에는 코로나19 사태로 어수선한 사회 환경을 고려하여 음력 11월11일(양력 12월 25일) 오전 11시에 대전광역시 유성구 용계동에 위치하고 있는 세계천부경협회 본부에서 임직원만 모여서 '한밭천천제'라는 주제로 조촐히 기념행사를 갖기로 했으나, 강화된 코로나19 정부 정책에 따라 12월 23일 전면 취소하기로 했다.   천부경은 글자 그대로 하늘의 이치에 부합하는 으뜸 경전으로 총 81자로 구성돼 있다.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天一一地一二人一三一積十鉅無匱化三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一玅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地一一終無終一   천부경은 숫자 6을 중심으로 상경 28자, 중경 24자, 하경 29자로 나누어진다.  천부경 81자 중 숫자가 31개, 그 31개 숫자 중 1이 무려 11개나 분포하여 천부경을 우주 수학의 원전, 일태극 경전이라고 한다.   천부경(天符經)은 하늘의 형상과 뜻을 숫자와 문자로 담아낸 조화경으로 우리 한민족 최고의 경전이지만, 아직까지 초중고 교과서에 수록되지 않아,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도 그 존재 여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불행중 다행으로 국내외서 천부경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2019년 12월 말 현재로 단행본이 130여 종 출간되었고, 학위논문이 77건(석사학위 54건, 박사학위 23건), 일반 학술논문이 199건이나 발표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젊은 사람들도 천부경에 대해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갖고 조사연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천부경은 원래 9000년 전 고대 환국으로부터 구전으로 전해오다가 6000년 전 한국의 고대문자인 녹도문자(鹿圖文字)로 기록돼 전승됐다. 그 후 4400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는 전서(篆書)로 전해졌는데, 신라의 대학자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이 돌로 만든 비석에 전서로 새겨진 천부경을 발견하고 묘향산 석벽에 한문으로 번역하여 옮겨 놓았다. 그런데 단학회 제2대 회장을 역임하고『환단고기(桓檀古記)』를 지은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1920) 선생이 1916년 9월 9일 묘향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석벽에서 천부경을 우연히 발견하고 탁본해서 1917년에 단군 교당으로 원문을 보내 세상에 알려졌다.   한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 81자는 상수학적으로 천(天) · 지(地) · 인(人) 삼원조화의 홍익철학(弘益哲學)을 함축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우주 만물의 생성·진화·완성의 원리를 잘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천부경은 우주 삼라만상이 1에서 나와 10까지 펼쳐졌다가 다시 1로 돌아간다는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 하늘(天) · 땅(地), 인간(人) 삼원이 모두 음양으로 작용해서 천지만물이 전개된다는 3수 원리와 음양 원리, 인간의 본심은 원래 태양처럼 밝고 환하여 천지(天地)와 하나가 된다는 태일사상(太一思想)을 담고 있다. 그런데 유사 이래 지구상 어느 나라 어느 학자도 81자의 경문으로 우주 만물의 생성·진화·완성의 원리와 인류 문화의 원형을 밝히지 못해 천부경은 동서양 학자들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천부경은 시의 특징인 단순성, 비유성, 상징성, 애매모호성을 모두 갖추고 있어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므로 독자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천부경을 소재로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여 창조경제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가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한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린 성암 전병훈 선생    천부경은 1975년에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한 대종교의 기본 경전으로 채택되었고, 성암(成庵) 전병훈(全秉薰, 1857-1927) 선생이 1920년 북경에서『정신철학통편』을 발간해 세계 29개국 약 150개 대학도서관에 보급하는 바람에 천부경이 국제화와 세계화가 되었다. 천부경의 無 정신에 괸심이 많았던 독일 실존철학의 대가 하이데커     독일 실존철학의 대가인 하이데커(Martin Heidegger, 1889- 1976)가 1950년대에 프랑스를 방문한 고 열암(洌巖) 박종홍(朴鍾鴻, 1903-1976)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1957년 7월 26일 프라이부르크 인근의 자기 집으로 초청해 천부경의 의미와 해설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런데 박종홍 교수는 부끄럽지만 당시 서양철학 전공학자로 한국철학을 공부하지 않아 천부경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답을 하지 못해 한국 철학을 서양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은 국학원과 증산도가 천부경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자주 개최하여 외국의 학자들도 천부경의 실체와 의미를 많이 알고 있다.   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을 계기로 하여 천부경이 초·중·고의 교과서와 대학의 동양철학 교재에 게재되어 모든 국민들이 천부경의 실체를 잘 알고, 천부경의 삼원조화의 홍익철학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여 인류 공영과 세계 평화에 나름대로 기여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음력 11월 11일 세계천부경의 날 기념행사가 앞으로 발전을 거듭해 국가 행사로 개최되고, 머지않아 천부경이 UNESCO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기를 열망한다.   <참고문헌> 1. 윤창대,『정신철학통편(전병훈선생의 생애와 정신을 중심으로)』, 우리출판사, 2004. 6.20. 2. 안경전,「인류 역사의 원형문화 원전, 천부경」, 사단법인 대한사랑,『대한사랑』2019년 가을호, 상생출판, 2019.10.2. 3. 호연지기, 천부경을 전세계에 알린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 알아두면 상식, 2020.8. 20. 4. 辛相龜, “제8회 세계천부경의 날을 맞아”, 중부매일, 2020.12.24일자.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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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25
  • 우리가 알고 있다는 질환
    우리가 아는 질환은 대부분 일반 사람들도 평이하게 이해하는 어느정도 일상 생활에 녹아있는 병들이다. 당뇨 고혈압 충수돌기(맹장)염  등등등과연 일반인이 잘 알고 있다는 이런질환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걸까?   당뇨의 진단 코드 즉 당뇨의 종류만도 200가지가 넘는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환자는 왜 분류를 했는지는 설명이 없으면 환자는 그저 당뇨일뿐이다.결국 처방에 따른 병만 있을 뿐이다.환자나 보호자도 처방을 듣는게 편하다. 200가지 넘는 분류 이유는 있지만 그곳은 전문 내분비 의사에게도 미지의 세계일뿐이다. 숙제는 미래의 세대에게 남겨 놓은것 처럼  엄청난 분류가 남겨져 있다. 현대 우리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반도체도 하루가멀다하고 새로운 제품 업그레이드된 상품이 나온다.핸드폰도 자동차도 등등등우리는 미시 세계 ,또한 거시세계를 같이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듣고 이해 하는척 또 아는척 하고 있다. 과거를 돌이겨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건 없다 .인간의 몸은 없어진것도 새로 생긴것도 없다. 그렇지만 인간의 정신 세계는 더 불안해져있다. 자신의 몸은 그대로 인데 정신세계는 왜  다른 현상을 보일까?새로운걸 찿기 때문인거 같다. 병에 걸리면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 한다. 새로운 좋은 음식 새로운 좋은 습관 새로운 좋은 환경 등등죽을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살아온 과정중에 잘못된것을 들을려고하고 고칠려고 한다. 그게 이유이건 아니건 관계없이많은 정보는 있지만 앞으로는 그정보의 판단을 스스로 내리는 구조로 세상은 변하고 있다.  즉 모든 정보가 공유 형태로 넘어가고 있다그래서 이제는 인터넷 한줄의 글로 사람들에게 들은 말로 모두가 전문이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진짜 전문으로 생각할줄 아는이들은 묻혀간다실제로는 우리가 아는 질환에 대해 알 능력도 안되면서 그들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   유성선병원 박문기 원장  영남대 의과대학을 졸업  대전선병원 교육수련부장, 중증외상센터소장, 유성선병원 진료부원장, 암센터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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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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