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3-01(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송시열 탄생 413주년을 맞아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대산 신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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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12.30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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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탄생한지 413주년이 되는 경사로운 날이다.


송시열초상.jpg
국보 제239호 송시열 초상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은 1607년(선조 40년) 11월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외가에서 은진 송씨 송갑조(宋甲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봉사(奉事) 구수(龜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응기(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갑조(甲祚)이다. 어머니는 선산 곽씨(善山郭氏)로 봉사 자방(自防)의 딸이다.

우암 송시열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세 살에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7세에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이를 받아썼다 한다. 아버지는 항상 주자는 공자의 후계자요 율곡은 주자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면서 송시열에게 주자를 열심히 배우라 권했다. 이후 8세가 된 송시열은 이종인 송이창(宋爾昌)의 문하에서 그의 아들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학문을 닦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후일 평생 뜻을 같이한 계기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12세 때에는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우암 송시열은 1625년(인조 3) 19세 때에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결혼했고, 22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 충남 연산에 은거하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러나 수학한 지 일 년 만에 스승이 주욱자 그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서 사사했다. 그와 같이 동문수학한 이들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시남(市南) 유계(兪棨) 등이었다. 이들이 이른바 충남 5현(忠南五賢)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이었다.

1633년(인조 11년)에 27세의 송시열은 대제학(大提學) 최명길(崔鳴吉)이 주관한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고 2년 뒤 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됐다. 후일 효종(孝宗)과의 두터운 의리는 이때 시작된 것이었다.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대군(大君)과 비빈(妃嬪)들은 강화로 피난하고 송시열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고 대군들이 볼모로 잡혀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속리산으로 내려와 피난해 있던 어머니를 모셨다. 난이 끝난 뒤에는 영동 황간으로 들어가 독서와 학문에 정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이 그에게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했다. 효종이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당시 총애를 받던 무관 이완(李浣)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세도를 부리던 김자점(金自點)이 귀양을 가자 그의 아들 김식(金鉽)이 부제학(副提學) 신면(申冕)과 공모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청은 군사를 동원해 국경을 압박하고 특사를 보내 협박과 공갈을 했다. 이로써 북벌은 잠시 중단되고 송시열도 책임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 : 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어 그의 시신은 경기도 수원 무봉산에 안장되었다. 그 후 숙종 23년인 1697년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매봉산으로 이장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 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학문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나,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언필칭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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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의 시문집『송자대전』겉표지

 그러므로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주자대전(朱子大全)』과『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서, 일생을 여기에 몰두,『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 朱子語類小分)』,『송자대전(宋子大全)』등의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철학사상도 주자가 구축한 체계와 영역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둔 것이었다.

여기에는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러한 정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조선 중기의 지배적인 철학·정치·사회사상을 정립하였다. 이후 이것은 조선 후기의 정치·사회를 규제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학문 체계가 되었다.

우암 송시열은 일생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공자의『춘추』속에 담긴 대의를 구현하였으며, 전쟁과 반란 등이 계속되어 무너진 인륜적 질서를 회복하는 데 절의의 숭상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해 전력을 쏟은 인물이다. 실제로 우암 송시열은 그의 생거지 적거지를 따라 그 행적과 자취를 돌아다보면 가정과 향당과 조정에서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실천한 참 선비였음을 곧 알 수가 있다. 큰 눈으로 보면 그가 추구한 세상은 의리가 존중되고 예의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문명(文明)의 세상이었다. 그것은 당시의 주류 조선 지식인들이 추구하던 이상 세계였으며, 또한 앞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 역시 종국적으로는 인간의 가치와 도리가 중시되고 예의가 존중되는 ‘문명의 세상’이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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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선생이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던 암서재 전경

 

우암 송시열 선생은 인생 만년에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은거하고 암서재(巖棲齋)에서 학문을 연마하면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장암(丈巖) 정호(鄭澔),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명재(明齋) 윤증(尹拯)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직(直, 곧 정직)으로 무장하여 올곧은 선비의 길을 걸었고, 학자로서 송자(宋子)에 이르렀으며, 학덕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한 시대의 산림(山林)의 종장이었으며, 북벌(北伐)과 예치(禮治)를 국가대의로 내걸고 시대를 이끌어 ‘대로(大老 : 나라의 큰 어른)’로 추앙되었던 큰 인물이다.

그리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1607-1684),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시남(市南) 유계(兪棨, 1607-1664) 선생과 함께 '충청오현'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으로 송자(宋子)란 존칭을 사용했다. 우암 송시열은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대전광역시 동구 우암사적공원에 마련된 유물관에는 우암 송시열의 영정과 인장, 효종이 우암에게 북벌을 당부하며 하사했다는 담비털옷, 글씨와 장서 등 그 당시 역사적 배경을 살필 수 있는 것들이 전시되어 선생의 흔적을 쫓아 사적공원을 찾은 이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은 우암 송시열 선생 탄신 40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1월 청명관에서 우암 송시열 선생 기획 특별전시를 열어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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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 선생 탄생 413주년를 기리는 숭모제 기념사진

그리고 동구청과 동구문화원이 해마다 10월 말에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 위치하고 있는 우암사적공원에서 우암 송시열의 높은 학덕과 대의를 기리는 우암문화제(학술대회, 우암 휘호대회, 전국백일장)를 개최하고 있고,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해마다 그가 태어난 날인 음력 11월 13일 전후에 우암 송시열의 고향인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마을에서 지역 유림과 은진 송씨 후손 등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숭모제를 열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참고문헌>

1. 대전광역시 충남대 유학연구소,『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 도서출판 이화, 2008.3.31.

2. 곽신환,『우암 송시열』, 서광사, 2012.9.30.

3. 한기범,『우암 송시열의 생거지와 적거지』, 누마루, 2014.5.10.

4. “송시열(宋時烈)”,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7.31.

5. 김갑동, “우암사적 공원과 송시열”, 금강일보, 2015.6.21일자. 3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5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112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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