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숙 시인 당선 소감
향기로운 꽃차를 마시며 얼어붙은 마음에 시라는 온기를 불어넣습니다. 종자 하나가 뿌리내리고 씨앗을 거두는 날까지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글밭을 가꿔 보렵니다.
자연이 내뿜는 은은한 향취와 풍채를 사랑하며 우주에 담겨 있는 신비로운 사연에 가만히 귀 기울입니다. 그들의 순수한 자태를 온 세상에 드러내어 무궁무진한 자원을 제공해주는 순리와 섭리에 따라 탁함에 청량함으로 정화되길 바라며 밝고 맑은 빛으로 전환을 희망합니다.
하늘을 향해 피어나는
꽃이 아니고서야
행여 슬프다거나 외롭다고
말할 수 있으랴
깊은 가슴 들여다보는
심안(心眼)으로
청초하고 맑아서 모든 사람이
꽃에서 지혜를 얻으리니
그 이름 서련(瑞)蓮)이라
한 톨의 온전한 씨앗이 되어, 삼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다가 조건이 주어지면 싹을 틔운다는 연꽃 씨앗처럼 시의 싹을 틔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초심을 잃지 않겠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광활한 시의 바다로 이끌어주신 문예마을과 미흡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항상 곁에서 지지해주고 헌신적으로 지켜보아 준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과 딸, 그리고 손자 손녀, 모든 가족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문예마을 27호 신인문학상 수상작 ‘말하는 낙서’
말하는 낙서
컴퓨터 옆 박스에 쌓인 이면지 스케치북
가벼운 문을 여는 순간
무지개 뜨는 언덕이 펼쳐진다
가냘픈 손에 꽉 잡힌 색색의 꿈이
종이 위에 꿈틀꿈틀
막힘없는 춤사위를 이룬다
정하는 문자 대신 선으로 이루어진 낙서
내면에 꼭꼭 숨은 감정의 골을 따라
형용할 수 없는 아이의 마음을 담았다
A⁴용지 끊이지 않는 원 속에서 말하는 낙서
훌쩍 커버린 의젓한 여중생 되어
일류대 가겠다는 야망으로
딸은 밤을 꼬박 새운다
누런 연습장에 낙서한 무언의 언어들
흐릿한 기억 속에 가물가물 흔적을 남기고
이면지 낙서가 말해주는 이상과 현실 사이
나는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못한다
어느 날 선들이 깨어나
깨알 같은 활자가 되어 이면지에 서성일 때까지,
등단 심사평(심사위원 深 幽 조 두 현)
세상에 불변의 진리가 있을까?
만약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한다”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당연하게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生老病死의 길에서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마저도 변해간다.
한영숙 시인의 글 속에 녹아있는 지난 시절을 돌아보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세월의 뒤안길에 머무는 그 시절들이 시인을 오라고 부르는 것 같다. 시인은 “말하는 낙서”에서 “~ 이면지 스케치북, /~ 무지개 언덕이 펼쳐진다”라고 노래한다.
어느 날 무심코 열어본 닫혔던 마음.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 노트처럼 한 쪽에 버려졌던 지난날을 살며시 들여다본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지난 시절 시인은 꿈과 희망에 부풀어 “~ 색색의 꿈이/ 시인의 마음에 /~ 막힘없이 춤사위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 한 곳에만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시인의 말대로 내면에 꼭꼭 숨은 감정의 골을 따라/ 형용할 수 없는 아이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의 감정은 시인의 세월을 따라 변해 왔을 것이다. 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며 꿈을 키우던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는 기억은 희미해지고 세상이 단순하게 이상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현실이라는 문제와 부딪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시인은 이상과 현실의 중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활자화되어 우리들의 기억을 깨울 때까지.
한영숙 시인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화된 현실을 직시하고, 또 다른 세상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세월 속을 걸어가며 아름답고 행복한 꿈을 꾼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이룰 수 없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들의 꿈과 희망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우리는 또 따른 세계를 걷는다.
그러나 이루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바람이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우리에게 찾아와 우리들을 옛날로 이끈다. 그것은 떠난 것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일 수도 있으리라. 아마 한영숙 시인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에 희망의 불씨를 켜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시인의 길로 들어선 것을 환영하며 축하한다. 인생길에 쉬운 길이 따로 없겠지만 시인의 길 또한 녹녹치 않다. 그러나 새로움에 용기 있게 도전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언제나 초심을 잊지 말고 앞으로 힘차게 나가기를 바란다.